인조반정

인조반정[仁祖反正]1623년(인조 1) 서인(西人) 일파가 광해군 및 대북파(大北派)를 몰아내고 능양군(綾陽君) 종(倧:인조)을 왕으로 옹립한 사건.
선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당론(黨論)의 폐해를 통감하고 이를 초월하여 좋은 정치를 해보려고 애썼으나, 자신이 대북파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당론을 초월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이원익(李元翼)·이항복(李恒福)·이덕형(李德馨) 등 명망 높은 인사를 조정의 요직에 앉혀 어진 정치를 행하려 하였으나,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 등 대북파의 무고로 친형 임해군(臨海君)과 이모제(異母弟)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였으며, 또 계모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유폐하는 패륜을 자행하였다.
이와 같은 광해군의 실정(失政)이 계속되어 기강이 문란해지자서인 이귀(李貴)·김자점(金自點)·김류(金)·이괄(李适) 등은 반정(反正)을 모의, 1623년 3월 2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모든 계획을 추진하였다.도중에 이이반(李而攽)의 누설로 탄로될 위기에 놓였으나 예정대로 거사를 단행하였다.
이서(李曙)는 장단(長湍)에서, 이중로(李重老)는 이천(伊川)에서 군사를 일으켜 홍제원(弘濟院)에서 김류의 군대와 합류하였다. 이 군대를 능양군이 친히 거느리고 이괄을 대장으로 하여 12일 밤에 창의문(彰義門)으로 진군하여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의 내응으로 반정군은 무난히 궁궐을 점령하였다.
이어 왕대비(인목대비)의 윤허를 얻어 능양군(인조)이 왕위에 올랐다. 광해군은 의관(醫官) 안국신(安國臣)의 집에 피신하였다가 잡혀 서인(庶人)이 되었으며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대북파 이이첨·정인홍·이위경(李偉卿) 등 수십 명은 참수되었으며, 추종자 200여 명은 유배되었다.반정에 공을 세운 이귀·김류 등 33명은 3등으로 나누어 정사공신(靖社功臣)의 호를 받고 권좌의 요직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이 논공행상(論功行賞)이 공평하지 못하다 해서 1년 후에 이괄의 난이 일어났다. 반정 후 남인의 이원익이 영의정에 영입됨으로써 남인도 제2의 당세를 형성하게 되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년(인조1)서인(西人) 일파가 광해군 및 대북파(大北派)를 몰아내고 능양군(綾陽君) 종(倧:인조)을 왕으로 옹립한 사건을 말한다.선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당론(黨論)의 폐해를 통감하고 이를 초월하여 좋은 정치를 해보려고 애썼으나, 자신이 대북파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당론을 초월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이원익(李元翼)·이항복(李恒福)·이덕형(李德馨) 등 명망 높은 인사를 조정의 요직에 앉혀 어진 정치를 행하려 하였으나,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 등 대북파의 무고로 친형 임해군(臨海君)과 이모제(異母弟)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였으며, 또 계모인인목대비(仁穆大妃)를 유폐하는 패륜을 자행하였다. 특히 임해군은 선조의 맏아들로서1608년선조가 죽자광해군에게 왕위를 선위(禪位)하는 교서를 내렸으나, 명나라에서 임해군를 즉위시키려 했으며, 소북파인 유영경(柳永慶) 등 일부 대신들도 선조의 교서를 숨기고 임해군를 왕으로 세울 것을 주장했으나, 정인홍 등에 의해 유영경의 교서를 숨긴 사실이 들어나, 임해군은 광해군에 의해 진도로 유배된 후 강화의 교동에 옮겨져서 이듬해 사사(賜死)되었다.
이와 같은 광해군의 실정(失政)이 계속되어 기강이 문란해지자 서인 이귀(李貴)·김자점(金自點)·김류(金)·이괄(李适) 등은 반정(反正)을 모의, 1623년 3월 2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모든 계획을 추진하였다. 도중에 이이반(李而狀)의 누설로 탄로될 위기에 놓였으나 예정대로 거사를 단행하였다.
이서(李曙)는 장단(長湍)에서, 이중로(李重老)는 이천(伊川)에서 군사를 일으켜 홍제원(弘濟院)에서 김류의 군대와 합류하였다. 이 군대를 능양군이 친히 거느리고 이괄을 대장으로 하여 12일 밤에 창의문(彰義門)으로 진군하여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의 내응으로 반정군은 무난히 궁궐을 점령하였다.
이어 왕대비(인목대비)의 윤허를 얻어 능양군(인조)이 왕위에 올랐다. 광해군은 의관(醫官) 안국신(安國臣)의 집에 피신하였다가 잡혀 서인(庶人)이 되었으며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대북파 이이첨·정인홍·이위경(李偉卿) 등 수십 명은 참수되었으며, 추종자 200여 명은 유배되었다. 반정에 공을 세운 이귀·김류 등 33명은 3등으로 나누어 정사공신(靖社功臣)의 호를 받고 권좌의 요직을 차지하였다.
즉,1620년부터 이서·신경진(申景)이 먼저 반정의 계획을 수립한 후 구굉(具宏)·구인후(具仁) 등을 끌어들이고, 이어 김유·이귀·최명길(崔鳴吉) 등의 문신과 연계하여 능양군을 왕으로 추대하면서 1623년 3월 12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모든 계획을 진행시켰다. 이 계획은 거사 직전에 이이반(李而)의 고변(告變)에 의해 누설되었지만 광해군이 후궁과 연회를 즐기느라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함으로써 예정대로 추진되었다.
능양군은 직접 병사를 이끌고 나아가 이서가 장단으로부터 통솔해온 700여 명의 군사와 연서역(延曙驛)에서 합류한 후, 김유를 대장으로 삼아 홍제원(弘濟院)에 집결했던 이귀·최명길·심기원(沈器遠)·김자점(金自點) 등의 600~700여 명의 군사, 그리고 이천으로부터 온 이중로(李重老)의 군사 등과 함께 창의문으로 진군하여 성문을 격파했다. 이어 창덕궁에 이르자 반정군에 포섭되었던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의 내응으로 훈련도감의 군사가 반정군을 체포하지 않고 오히려 성문을 열어줌으로써 대궐을 쉽게 점령했다.
반정세력은 서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의 호를 회복시켜준 후 그 권위를 빌려 광해군과 동궁을 폐출하고 선조의 손자인 능양군을 왕위에 추대했다. 한편 광해군은 반정군이 대궐에 침입한 뒤 비로소 대궐 뒷문으로 달아나 의관(醫官) 안국신(安國臣)의 집으로 숨었으나 곧 체포되어 서인으로 강등된 후 강화로 귀양보내졌다.
또한 폐모정청(廢母庭請) 등에 앞장섰던 대북파의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 등은 물론 북인으로서 광해군 말기까지 정치에 관여했던 수십 명이 처형을 당하고, 200여 명이 유배당했다. 반면 반정에 참여한 인물들은 1623년(인조 1) 윤 10월 53명이 정사공신(靖社功臣)으로 책봉되었다.
즉, 김류·이귀·김자점(金自點) 등의 10명은 1등공신, 이괄(李适)·김경징(金慶徵) 등 15명은 2등공신, 박유명(朴維明)·한교(韓嶠) 등 28명은 3등공신이 되었다. 그러나 이 논공행상(論功行賞)이 공평하지 못하다 해서 1년 후에이괄의 난이 일어났다.
반정 후 남인의 이원익이 영의정에 영입됨으로써 남인도 제2의 당세를 형성하게 되었다

post by Tuesday, October 08, 2013 23:10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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